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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1997년 4월호 작가 공동철“봉한 학설은 노벨상 받을 만한 업적”

 

《1960년대 북한이 「세계과학사에 금자탑을 이룬 업적」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김봉한의 봉한학설. 한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과 경혈의 실체를 밝혔다고 알려진 봉한학설은 그러나 하루 아침에 폐기되고 김봉한은 숙청당한다. 「김봉한」 「소설 김봉한」등을 펴낸 공동철씨가 김봉한의 삶과 봉한학설을 재조명했다.》

매년 북한에서 발행하는 『조선중앙연감』 1962년도 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과학연구사업에서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한 당 정책과 김일성 동지의 교시를 관철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특히 동의학의 우수한 점들을 계승 발전시키는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이룩하였다. 독특한 실험연구방법을 창안하여 경락의 실태를 파악하였는 바, 동물 및 인간 유기체 내에는 조직학적 및 실험생리학적 성질에 있어서 신경계통, 혈관 및 임파계통과는 명확히 구별되며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해부조직학적 계통으로써 경락 계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해명하였다. 

 

이 연구 성과는 우리나라에서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 있는 동의학 이론에 확고한 과학적 및 물질적 근거를 부여하였으며 현대 생물학과 의학 발전에서 탁월한 기여가 된다. 이는 금후 동의학을 급속히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계기로 되며 현대 생물학과 의학의 각종 현대 생물학과 의학의 각종 이론들은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것은 1961년 김봉한팀이 동양의학의 핵심 개념인 경락(經絡)의 실체를 발견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경락상의 중요 지점인 경혈(經穴)은 침을 놓고 뜸을 뜨는 자리이므로 경락론은 한의학의 토대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경락과 경혈의 해부학적 실체가 밝혀지지 않아 서양의학에서는 그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다. 나아가서는 경락을 토대로 전개되는 동양의학 전체를 과학적 근거가 없는 의학이라고 멸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영국의 한 출판사에서 발행된 『세계미신사전』에는 동양의학이 미신의 하나로 등재돼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경락의 과학적 객관적 실체를 구명했다고 하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1964년의 『북한중앙연감』에는 김봉한팀의 계속적인 놀라운 연구 성과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김봉한 교수를 비롯한 경락 연구집단들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1961년 경락실태를 발견한 후 그에 관한 연구를 독창적 방법으로 더욱 심화 발전시켜 경락계통의 형태와 그 기능의 전 면모를 기본적으로 확정하였으며 특히 핵산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을 세상에 내놓았다.(중략) 

 

경락계통에 관한 연구 성과는 경락 계통의 엄격한 객관적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생체의 조절기전을 포함한 생명 현상의 근본문제를 일면적으로 설명하여 온 기존 학설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업적은 세포의 분화, 물질대사, 유전, 유기체의 반응현상, 질병의 발생과 그 발전 등 현대 생물학과 의학 부문 앞에 제기되고 있는 당면한 근본 문제들을 연구 해명함에 있어서 광명한 전망을 열어주며 또한 인간의 건강과 장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새로운 서광을 비춰준다. 

 

이 위대한 발견은 현대 생물학과 현대 의학 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개척한 혁명적 사변이며 세계과학사에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다』 

특히 1964년판 『조선중앙연감』의 사진 화보에는 김봉한 박사 사진이 공적 설명과 함께 크게 실려 있다. 『북한중앙연감』에서 김일성 이외에 개인 사진이 크게 게재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북한 당국에서도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김봉한팀은 1961년 「경락에 관한 제1논문」을 발표하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63년 「제2논문」을 발표했다. 김봉한팀의 제2논문은 『북한중앙연감』에 기록된 바와 같이 혁명적 사변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제2논문은 경락의 실체가 분명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경락의 기능이 동양의학 고전에 기록되어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생물학적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유사 이래 축적된 서양의 모든 과학업적에 가해진 한 방의 케이오(KO) 펀치 같은 것이었다. 

 

북한 당국의 대대적인 선전에 힘입어 김봉한팀의 연구성과는 전세계를 경악케 했다. 세계 유수의 학자들이 북한을 방문했고 김봉한팀에 대한 초청장이 쇄도했다. 

 

이러한 사실을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북한에 대한 엄격한 보도 통제 때문에 정부 고위층 몇 사람과 해외여행 경험이 있는 극소수 인사들에게만 정보 가 들어갔을 뿐이다. 

 

남한에서도 1960년대 말부터 해외여행 경험이 있는 대학교수들로부터 소식이 새어 나오기 시작해서 당시 의과대학과 한의과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김봉한 논문연구 서클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서클은 나중에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많은 회원들이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서서 김봉한과 관련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김봉한의 연구성과가 거짓으로 드러났다』 『북한이 세계를 상대로 한판의 정치쇼를 벌인 것이다』 『김봉한이 조선을 수치스럽게 했다는 죄목으로 숙청되었다』 『김봉한이 아오지탄광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자살했다더라』는 등등의 소문이었다. 

 

이러한 소문이 돌면서부터 남한에서도 그나마 존재했던 김봉한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그로부터 20년 이상 그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필자가 그의 이름을 다시 접하게 된 것은 1990년에 들어서였다. 

대안의학으로 소개된 봉한학설

1990년 10월 어느날, 필자는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 서적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당시 필자가 일하고 있던 출판사(정신세계사)는 다량의 외국 서적을 들여와 번역 출판하는 것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정신세계사는 주로 건강, 대안 의학, 명상 등의 분야를 전문으로 출판하고 있었다. 

 

어떤 책을 훑어보던 중 한 구절에 시선이 꽂혔다. 그것은 「Kim Bong Han」이라고 쓰인 부분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김봉한」이라는 한국인 이름의 영문 표기였다. 아울 러 눈에 띄는 것은 그가 「North Korean Scientist」, 즉 「북한의 과학자」라는 대목이었다. 

 

그 책(1988년 발행)은 미국의 한 의학박사가 의학의 정통 이론에서 벗어난 여러 가지 대안적 의술을 소개한 베스트셀러로서 침술 편에서 김봉한을 다루고 있었다. 

 

책에는 김봉한팀이 서양 의학과 과학이 빠뜨리고 있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고 씌어 있었다. 아울러 『김봉한팀이 동양의학의 핵심적 개념인 경락의 실체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경락이 진단과 치료의 핵심체이며 아울러 생명 현상의 근원이라는 것을 구명했다』고 썼다. 

 

「김봉한」이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들어본 이름이었다. 몇 년 전 한의학을 공부하는 친구에게서 북한 학자인 김봉한이란 사람이 경락의 실체를 발견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경락이란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신비스러운 개념이기는 하지만 그 실체를 구명할 수가 없어서 현대 과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그 실체를 발견했다고 하니 자연 관심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경락 발견이 대내외적으로 엉터리로 판명되어 김봉한이 북한 정부로부터 심한 문책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그러나 김봉한에 대한 자료를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의 남북관계는 요즘과는 달리 첨예한 대치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봉한의 발견에 관련된 자료가 공개되지도 않았고 또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더이상 어떻게 알아볼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지나가고 말았는데 이렇게 외국 서적으로 그의 이름을 다시 만난 것이다. 

 

많은 판매 실적을 갖고 있는 미국의 대중의학 서적 속에 김봉한이란 이름이 들어 있다는 것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김봉한이 도대체 어떤 인물이며 또한 그의 이론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이 생겼다. 필자는 인간 김봉한과 「봉한학설」로 알려진 그의 이론 전모를 추적해 보기로 결심했다.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의 근본적 차이

여기서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의 차이에 대해 잠깐 짚어보고 넘어가자. 서양의학과 동양 전통의학의 차이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경락과 경혈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 전통의학에서 핵심적인 개념인 경락은 전신(全身)을 달리면서 인체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주관하는 통로라고 알려져 왔다. 인체에 질병이 생길 때 그 증상이 최초로 나타나는 곳이 경락이고, 또 질병 치료도 그 경락을 조절함으로써 가능하다. 경락을 조절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침구(針灸)법이다. 

 

경락에는 그 중간 중간에 인체 외부환경과의 교류장소인 경혈이라는 지점들이 있다. 침구법은 이 경혈에 침(針)을 놓거나 뜸(灸)을 떠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경락을 조절하는 방법에는 침구법 이외에도 사지(四肢)를 비틀어 움직이는 도인(導引)법, 사지에 힘을 집어넣는 기공(氣功)법 등이 있다. 

 

침구법에 의한 치료의 예를 들어보자. 머리 꼭대기에 있는 「백회(百會)」란 경혈에 침구를 하여 치질(痔疾)을 치료하고, 무릎 관절 바깥쪽 하부에 있는 「족삼리(足三里)」에 침구를 하여 위장(胃腸) 질환을 치료한다. 치질을 치료하는 데 머리에 침을 꽂는다든지, 또는 위장 질환을 치료하는 데 다리에 침을 놓는 것은 얼핏 보기에 불합리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많은 질병들을 성공적으로 다스려 왔다. 그것은 인체 내·외부에 경락이라는 연결 통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의학에서 최선의 치질 치료는 제거 수술로 알려져 있다. 서양의학의 다른 치료법이 대부분 그렇듯이, 문제가 되는 부분을 도려내버리는 것이다. 위장 질환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는 부분을 무자비하게 잘라내든지 또는 일종의 인공화학약품인 약물을 투여한다. 그런데 이러한 치료 방식은 대개 제대로 치료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환자에게 해악만 입힌다. 잠시 치료된 듯하다가도 재발하기 일쑤다. 

 

근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서양의학에는 경락이란 개념이 없다. 인체 내부의 모든 기관과 조직을 밝혀 놓았다는 서양의학의 해부학에서 이 경락이란 조직은 존재 하지 않는다. 오늘날 서양의학은 합리적이고도 객관적인 체계를 갖춘 과학적 의학으로 인정되고 있다. 반면에 존재하지도 않는 경락이란 것을 토대로 전개되는 동양 전통의학은 자연히 객관적 근거가 없는 비과학적 의학으로 평가돼 왔다. 

 

전통의학은 그 세가 서양의학에 밀리기는 했지만, 동부아시아 지역에서 그 맥이 유지돼 왔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전통의학이 서양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중국을 방문한 서양 인사들이 침술의 놀라운 효능을 경험하고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널리 알렸던 것이다. 

 

이후 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침술을 연구했다. 오랜 연구와 실험 끝에 그들은 『경락과 경혈의 존재 여부야 어떻든간에, 분명한 것은 침술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서양의학의 대세는 경락의 존재와 침술을 공인하지 않는 쪽이다. 경락의 존재와 침술의 공인은 곧 서양의학의 자존심의 엄청난 실추와 의학계의 일대 개편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양의학계가 경락의 존재와 침술의 인정이라는 엄청난 변혁을 거부하며 버틸 수 있는 것은 아직 경락의 객관적 실체가 구명되어 공인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60년대에 이미 한 한국인이 경락의 실체를 멋지게 밝혀 놓았던 것이다.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 양의사

알고 보니 김봉한은 놀랍게도 지금의 서울대 의대 전신인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 양의사였다. 서양의학을 전공한 양의사가 경락의 실체를 구명하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중앙일보사에서 발행한 『북한인명사전』에 그의 이력이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다. 

 

◆약력
※1941년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
※50년 한국전쟁 당시 월북
※53년 1월 평양의학대학 생물학 부교수
※61년 8월 논문 「경락 실태와 그 관계」발표
※62년 1월 학위-학직 수여위원회 제4차 상무위원회에서 의학박사 학위, 평양의학대학 생물학 강좌장
※63년 11월 경락 연구의 새 성과에 대한 학술 논문 발표>
※64년 3월 내각 직속 「경락연구원」 창설에 따라 경락연구원장
※65년 4월 생명 유기체의 자기 갱신에 관한 신학설 제창

 

필자는 서울대 의대 동창회사무실을 찾아갔다. 김봉한의 동창생을 찾아서 그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벌써 50여 년 전의 일이라 졸업동기생 중 생존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동창회 사무실 직원이 명부를 뒤적이더니 생존자 중에 한격부 박사를 추천해 주었다. 

 

전화를 받은 한박사는 다행히도 대학 시절 김봉한과 절친한 사이였다. 한박사는 또렷한 목소리로 『그는 대단히 정열적인 학구파였고 진실한 친구였다. 엉터리를 진실인 것처럼 발표할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봉한은 의과대학생이었지만 물리학 수학 철학 등을 깊게 공부하여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봉한이란 사람이 충분히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치와 외세에 희생된 위대한 학자를 부활시키고 있다는 느낌에 가슴이 떨려 왔다. 

 

며칠 후 한박사를 찾아갔다. 김봉한과 함께 1941년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한박사는 1979년부터 서울시립노인요양원 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김봉한이 지금의 경복고등학교인 서울 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들은 예과 3년, 본과 4년 도합 7년의 의대 과정을 같이 공부했다. 한박사의 기억에 따르면 김봉한은 뛰어난 두뇌와 학문에 대한 정열을 갖고 있던 학생이었다. 

 

김봉한은 당시로서는 첨단 분야였던 원자물리학에 관심이 깊었다. 그가 대학에서 공부하던 1930년대 말은 아직 최초의 원자폭탄도 만들어지기 이전이어서 원자물리학 개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원자물리학은 상당히 까다로운 분야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그 분야를 열심히 공부했을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는 원자물리학을 열심히 해둔 덕분에 나중에 경락체계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얻는다. 그는 방사성 동위원소의 방사선 방출 성질을 이용한 방사선추적법을 이용해 경락의 존재를 증명했던 것이다. 

 

김봉한은 칸트와 니체의 철학을 탐독했고, 한박사와 함께 고려대학교 전신인 보성전문 철학과 교수로 있던 안호상 박사를 찾아가 철학토론을 벌이곤 했다. 김봉한은 스포츠에도 능하고 민족주의적 의식과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졸업 후 김봉한은 얼마간 의대 생의학교실에 인턴으로 있다가 부속병원의 내과의사를 거쳐 지금의 고려대 의대 전신인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 내과 조교수로 근무했다. 그 때 6·25전쟁이 발발했고 그 와중에 월북했다. 한박사는 적극적 월북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정교사를 해가며 학업을 해야 했던 나 같은 사람과는 달리 김봉한은 집안이 유복해 그럴 필요가 없던 사람이다. 또한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적극적 월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그렇게 아는 것이 많고 비판의식이 있는 지식인이 획일적인 공산주의에 대해 호감을 가졌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한박사는 월북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다만 1960년대 말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가 봉한학설을 발표해 전세계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한박사에 의하면, 국내를 제외한 여러나라에서 봉한학설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하니까, 당시 중앙정보부가 김봉한과 동기생인 서울대 의대 생의학교실의 남기영 박사(현재 작고)에게 학설 검토를 의뢰했다고 한다. 그 후 봉한학설이 거짓으로 몰려 김봉한이 불행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북에서의 상황은 최근 국내에서 재발행된 북한의 의학서적들과 통일원에서 일반에게 열람시키고 있는 북한관계 자료들, 그리고 북에서 의사로 복무하다가 월남한 김만철 씨의 증언을 통해 추적했다. 

권력서열 4위 박금철의 부침

1987년 1월 북한에서 일가족을 데리고 월남한 김만철씨는 1968년 청진의학대학을 졸업했는데, 김봉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의과대학에서 내과를 전공했는데, 동의학 과목을 수강하면서 김봉한의 업적에 대해 강의를 받았다. 북한 의과대학에서는 동의학이 필수 이수과목이기 때문이다(현재 남한의 국립의과대학에서 한의학 강좌가 개설되어 있는 곳은 없다. 사립대학까지 통틀어 1996년 봄학기에 연세대 의과대학에서 최초로 한의학개론 강좌를 개설했다). 

 

김씨는 김봉한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북한 권력서열 제4위인 박금철이 숙청되면서 김봉한도 지지기반을 잃어서 그의 학설까지 유폐된 것이라고 했다. 봉한학설이 학문 외적인 이유로 폐기되었다는 이야기다. 

 

박금철이란 인물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마침 「월간중앙」 1989년 신년호 별책부록인 「오늘의 북한」에 박금철에 대한 정보가 나와 있었다. 

 

『박금철은 일제 때 보천보 습격사건에 가담한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광복과 동시에 풀려났다. 박금철은 이후 당의 요직을 두루 거쳐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 부위원장으로 권력 서열 제4위에 오르게 된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967년, 이른바 갑산파(甲山派) 숙청시에 실각한다』 

 

김만철씨의 증언과 부합되게 봉한학설의 탄생과 소멸은 박금철의 권력층 재임시절인 1956~1967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1956년에 연구가 시작되어 1961년 첫 논문이 나왔 고 1965년에 마지막 논문이 나와서 전세계의 주목을 받다가 1967년 이후 돌연 학설이 쇠퇴한 것이다. 

 

박금철이 권력 서열 제4위에 오른 1956년에는 북한 동의학계에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같은해 8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인민보건사업을 강화함에 대하여」라는 결정을 채택한 것이다. 

 

그 내용은 1964년 북한의학출판사가 펴내고 1991년 도서출판 「열린책들」에서 다시 펴낸 『알기 쉬운 침구학』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8·15 해방 후 보건 분야에서는 일제가 남긴 식민적 의료제도를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국민보건제도를 창설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민족문화 유산의 중요한 부문의 하나인 동의학도 다른 부문과 함께 연구되고 발전될 길이 환하게 열렸다.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는 우리 인민들이 오랜 기간 사용하고 습관화된 동약을 깊이 연구 분석하여 그 우수한 점을 살려서 인민보건사업에 활용할 것을 제시했다. 

 

이에 근거하여 1956년 8월 전체회의에서는 동의학을 계승 발전시킬 것을 제시하면서 동의사들을 국가 치료예방 기관에 편입시킬 것과 협동단체에 망라시켜 그들을 예방치 료 사업에 적극 참가시킴으로써 인민들에게 더 많은 동의학적 치료 혜택을 줄 것을 제시했다. 또한 동의학 연구기관을 설치하여 「동의학의 우수한 점들을 과학적으로 연구 분석하여 이론적으로 체계화할 것」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동의학의 과학화 과업은 평양의학대학에 떨어졌다. 의학과 관련된 연구 역량을 지닌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53년부터 평양의학대학 생물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김봉한은 1956년 당 대회 결정인 「동의학을 과학화하는 연구」에 자연스럽게 참여해 주도적 역할을 맡는다. 

서양의학 토대 무너뜨린 봉한학설

그는 우선 동의학 침술의 근간이 되는 경락과 경혈의 실체를 구명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그는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과학기술 수단을 총동원해 경락을 추적했다. 그가 동원한 과학기술 수단은 전자현미경, 분광분석기, 오토라디오그래프, 특수 색소 도포, 전기적 분석 등으로 당시 선진국의 과학자들도 접근하기 만만치 않은 것들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선 북한 당국이 동의학 과학화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무엇보다도 김봉한이 그런 기계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6년 김봉한팀이 동의학 과학화 연구에 착수한 지 5년 만인 1961년 8월에 드디어 「경락의 실태에 관한 연구」라는 첫 논문이 나왔다. 이어서 1963년 11월에 제2논문 「경락 계통에 대하여」가 발표되었다. 다시 1년 3개월 만인 1965년 4월15일에 개최된 「조선 경락학회 제1회 학술보고회」에서 제3논문 「경락학설」과 제4논문 「산알학설」이 발표되었다. 다시 6개월 만인 1965년 10월에 제5논문이 마지막으로 발표되었다. 

 

그의 논문은 처음에는 단순히 「경락의 객관적 실체 구명」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논문에서는 경락에 대한 고전 이론과 현대 생물학 및 의학의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사실들이 수록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결국 김봉한팀의 성과는 나중에 「봉한학설」이란 독특한 체계를 갖추기에 이른 것이다. 

 

근대 산업화 사회의 주요 산물은 모두 서구의 과학기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의학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서구 의학만이 과학과 기술이라는 토대를 가지고 있는 합리적 의학으로 군림해왔다. 그에 비해 동양의 전통의학은 근거가 없는 비과학적 의학으로 천대받고 있었다. 

 

봉한학설은 우선적으로 그러한 경향을 일거에 해소해 버릴 수 있는 업적인 것이다. 서양의학을 전공했지만 폭넓은 기초과학 지식을 갖고 있던 김봉한은 동의학 과학화 과업이 자신에게 떨어지자 우선 경락과 기의 객관적 실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연구에 착수한 지 5년 후부터 김봉한팀은 경락과 기의 객관적 실체를 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구명하고 보니 경락은 고전 경락학설의 설명을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었다. 경락은 생명의 발생과 유지를 원천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조직이었다. 따라서 질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경락을 다스려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봉한학설에서 침구술 같은 경락 조절 의술에 의한 질병 치유 효과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연구 중의 하나는 태아 수태시의 경락에 대한 관찰이다. 놀랍게도 수정란으로부터 태아가 수태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생기는 것이 경락 조직이었던 것이다. 경락이 가장 먼저 발생해 다른 조직의 형성을 유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락이 생기지 않고는 다른 어떠한 조직이나 기관도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경락에 이상이 생기면 해당 기관에 이상이 생겨 질병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질병과 건강을 관리할 때, 생명 유지의 원천적 책임 조직인 경락을 조절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김봉한팀은 계속해서 서구의 의학과 생물학에서의 설명들을 뒤집어 엎는 결과들을 발표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1965년에 발표한 「산알학설」이었다. 산알학설의 골자는 세포 이전의 형태로 산알이란 것이 존재하고, 그것이 경락을 순환하면서 세포의 생성과 사멸을 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포가 세포분열에 의해서만 생긴다는 종래의 세포이론을 뒤엎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고전 경락이론을 하나의 거대한 학문 체계로 완성한 김봉한팀의 독보적 업적이었다. 

김봉한 위해 경락연구원 설립

봉한학설은 1960년대 초반 북한에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고, 북한 당국은 그것을 국내외에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북한 당국은 김봉한의 공로를 치하하고, 급기야 그를 위 한 별도의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964년 2월17일 공화국 내각에서는 경락계통 연구 사업을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 결정 제10호를 채택하고 평양의학대학 경락연구소를 개편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락연구원을 조직했다. 또한 이 결정에 따라 이해 4월25일에는 조선경락학회가 결성되었다』 (『조선중앙연감』, 1965, 170p) 

 

1964년 이전 북한의 국가 과학연구기관은 과학원, 사회과학원, 농업과학원, 건설과학위원회 그리고 의학과학원의 5개 기관이 있었다. 그 중 의학과학원에는 동의학연구소, 위생연구소, 미생물연구소, 제2임상의학연구소, 수혈연구소, 약학연구소, 광천물리치료연구실 등 7개의 산하 구소가 있었다. 그런데 위의 결정에 따라 의학과학원 산하 동의학연구소는 그대로 두고 경락연구원이 국가 과학연구기관으로 따로 하나 만들어지면서 거기에 김봉한이 원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이것을 보면 당시 북한 당국이 김봉한의 업적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 짐작된다. 의학과학원이 엄연히 있고 그 산하에 동의학연구소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김봉한을 위해 의학과학원과 동격의 경락연구원을 설립한 것이다. 더군다나 동의학연구소가 11개의 연구실을 갖고 있던 데 비해 경락연구원은 40여개의 연구실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북한이 이렇게 높이 평가했던 그의 업적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 아침에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버린다. 

봉한학설이 폐기된 배경에는 김만철씨가 증언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요인들이 겹쳐 있었다. 필자가 추적하고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요인들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서구 의학계의 강력한 거부 ▲ 주변 동의학계의 은근한 반발 ▲ 정치적 사건 연루 ▲ 생체실험 여부에 대한 논란 등이다. 이를 하나씩 짚어보자. 

서구의학계, 봉한학설 부정

김봉한의 연구 발표는 16세기 과학계의 대사변인 코페르니쿠스의 발견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1534년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 는 지동설(地動說)을 발표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가톨릭의 우주관이 지배하고 있던 사회에 일대 파문을 일으킨다. 그의 학설은 당시 정치 및 종교계를 장악하고 있던 가톨릭 교단으로부터 혹심한 박해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발견은 오늘날 진리로 살아 남았다. 

 

김봉한이 연구 결과를 발표한 1960년대 초반만 해도 서양은 동의학이나 중국의 한의학을 도무지 과학적 의학이라고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해부학 교과서에는 경락이란 것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김봉한이 경락의 실체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경락이 생명의 발생과 영위에 결정적이고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구명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경락이 엄연히 존재하고 또한 생명 현상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2천년의 전통을 가진 서양의학이 경락의 존재와 기능을 전혀 모르는 「반쪽 의학」이 되기 때문이다. 생명 현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모른 채, 어떻게 사람의 질병을 제대로 진료하고 또 어떻게 생명을 논할 수 있겠는가? 세계의학계는 긴장했다. 

 

김봉한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소련과 동구권은 물론이고 세계의 모든 의사와 관련 학자들은 경락의 개념을 기본으로 하는 동의학을 학습해야 될 판이었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발표했던 모든 논문이 우습게 될 것이고 또 의학과 생물학에 관련된 각급 학교의 모든 교과서들을 고쳐 써야만 했다. 한글로 쓰인 의학 서적과 교과서를 수입해서 공부해야 만 할 형편이었다. 

 

그들에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그러한 사변이 일어나지 않도록 행동했다. 1967년 소련 의학계에서 『경락에 대한 실태 발견은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했던 것이었다. 

 

소련의 불인정 발표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한의학 경시 태도 이외에도 소련 의학자들의 능력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방대한 분야의 학문과 기술에 통달한 위대한 천재과학자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할 능력이 없었다. 

 

봉한학설이 궁지에 몰리게 된 데에는 중국의 한의학계나 북한 내 동의학계의 지지 부족과 반발도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의학계의 은근한 반발

그러나 동양 전통의학계에서 공식적인 반박이나 불인정 발표는 없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북한 내의 동의사들이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북한 의학출판사가 1964년에 펴낸 『침구학』의 머리말에는 봉한학설에 대한 환영의 뜻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부터 조국 의학 유산을 일관성있게 발전시켜 왔으며 특히 1956년 8월 전체 당 대회는 동의학 발전에 기틀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오늘 동의학 유산이 찬란하게 개화 발전되었으며 특히 동의학의 기본 이론체계의 하나인 경락 계통을 발견함으로써 침구 요법의 이론적 기초와 침구 치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일본의 한(漢)의학계나 북한의 동의학계에서 적극적인 지지가 부족했거나 다소간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높이 평가받던 봉한학설이 소련 의학계의 간단한 발표 하나로 하루 아침에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김만철씨에 따르면 소련의 발표가 있은 1967년 이후에도 북한 내에서 봉한학설의 진위 여부에 대해 한동안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적극적인 지지가 불가능했던 첫째 이유는 봉한학설이 전개하고 있는 경락 계통이 동의사들의 상상력을 뛰어넘을 만큼 거대하고 역동적인 체계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처음에 환영의 뜻을 나타냈던 봉한학설의 경락 계통이 동의사들의 능력을 훨씬 벗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무어라고 논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내심으로는 봉한학설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둘째 이유는 김봉한이 구사한 연구 방법론이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기초과학에다 전자현미경, 방사선 추적장치, 분광분석기 등 첨단 장비로 무장돼 동의사들의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셋째 이유는, 기득권을 갖고 있던 기존 동의사들의 불만을 들 수 있다. 북한 정권 창립 후 줄곧 실시한 동의학 중흥 정책 덕분에 김봉한의 연구 발표가 시작된 1960년대에는 동의학계에 일정한 질서와 체계가 잡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능력이 있고 경험이 많은 동의사들은 동의학계의 지도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서양의학을 전공한 김봉한이 동의학계의 최고 실력자로 등장한 것이다. 1964년 북한 정권은 국가 직속 「경락연구원」을 설립하고 김봉한을 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 동의학계의 권위는 동의학연구소로 상징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의학연구소의 상급 기관인 의학과학원과 동격의 경락연구원이 설립되었고 거기에 김봉한이 원장으로 취임했다. 동의학계의 최고 권위가 하루아침에 경락연구원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이에 기존 동의학계 원로들의 반발이 컸을 것임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앞에 말한 세 가지 이유 외에도 동양 전통의학계의 반발을 유발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동양 전통의학에서 수천년 동안 경락이란 명칭으로 불리던 것을 김봉한의 이름을 따서 「봉한관」이라고 다시 명명한 점이었다. 그리고 경혈은 「봉한소체(小體)」라 명명했던 것이다. 

수천년 동안 한국 중국 일본의 전통의학계에서 공히 경락이라 부르던 것을 하루 아침에, 별로 들어보지도 못했던 사람의 이름을 붙여 부른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름을 바꾸는 것은 전통의학의 개조(開祖)로 알려진 황제(黃帝)나 신농(神農)과 함께 많은 의인(醫人)들이 추앙하던 역사상의 명의들에 대한 불경 행위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봉한 연구팀이 경락을 다시 명명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경락을 추적하다 보니까 경락 계통이 고전 전통의학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방대하면서도 조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체계적으로 접근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북한에서는 어떤 작품이나 업적에 창설자나 공로자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 김책제철소 등이 그 예다. 

갑산파 숙청사건에 연루

1967년 5월4일 개최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는 북한정권 역사상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회의였다. 회의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김일성의 장남 김정일이 정치무대에 등장하면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강화할 것」을 채택한 것이었다. 여기서 「당」이라 함은 사실상 김일성 개인이었다. 

 

회의에서는 또한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의 종파분자 숙청 이후 최대의 문책인사가 단행되었다. 이른바 「갑산파 숙청사건」이라고 알려진 사건이다. 여기서 갑산파의 맹주 박금철이 숙청됨으로써 김봉한에게도 그 불똥이 튄 것이다. 

 

김정일은 불과 27세의 나이로 중앙 정치무대에 나타났다.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을 거쳐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바로 정치일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먼저 김일성 경호업무를 맡고 있는 호위총국의 별동대를 조직했다. 말하자면 경호실 위에 또 하나의 친위대를 조직한 셈이다. 이로써 김정일은 사실상 김일성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공식화되었다. 

 

김정일은 제1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그 처리를 망설이고 있던 인사들을 가혹하게 공격했다. 회의에서는 박금철을 위시한 갑산파가 모조리 공격을 받았다. 당시 노동당은 비서국을 두고 있었다. 김일성이 총비서였고, 나머지 10명의 비서에는 최용건, 김일, 박금철, 리효순, 김광협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회의결과 당서열 제4위인 조직비서 박금철을 위시하여 서열 제5위인 대남공작비서 리효순, 당 선전선동부장 김도한, 과학연구담당 부수상 고혁(高赫), 당 문화예술부장, 국제부장, 중앙통신사장, 사로청 위원장, 검찰총장, 문화상 등이 숙청되었다.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노동당 간부 중의 한 사람이 나중에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었는데, 그는 회고록 『조국』에서 이날 회의의 풍경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회의는 먼저 사회자인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최용건이 당 내부에 있는 문제를 비판하면서 시작됐다. 

    『먼저 당조직비서인 박금철 동무에 대한 문제를 비판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우렁우렁하면서도 쉰 목소리였다. 

    『이에 대한 당중앙위원회의 집중지도결과를 김정일 동무께서 보고하시겠습니다』 

    잠시 후 깡깡 깨지는 젊은 사람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박금철 동무는 당조직비서로서 도당책임비서를 비롯하여 군당책임비서 등 중앙당에서 비준하는 인물을 등용, 배치, 해임, 철직시키는 사업을 하면서, 당책임비서 자리를 자기의 측근자로 배치해서 추종자를 꾸려 놓고, 봉건유교사상까지 주입시키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비판하는 김정일의 목소리는 매몰찼다. 박금철의 비판항목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제시절 김일성부대의 보천보습격 사건 때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변절해서 동료들을 고발한 사실, 김일성의 현지지도를 멋대로 바꾼 행위, 자신의 고향 갑산에 양옥집을 크게 지어놓고 아내를 혁명가로 과장하여 비석을 세우고 부각시킨 행위가 비판받았다. 

 

박금철의 마지막 비판항목이 김봉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었다. 박금철의 24세 된 맏딸을 경락연구소에 배치하여 김봉한 박사 등 경락연구소 연구원들에게 논문을 쓰게 해서 학위를 받게 했다는 것이었다. 

 

김봉한의 인물 됨됨이로 보아 박금철의 딸이 연구생활을 잘하도록 신경을 써주기는 했겠지만, 논문을 대신 써 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김봉한에게 독직죄(瀆職罪)를 덮어씌우기 위한 공작이었다. 당시에 김봉한에게 독직죄를 덮어씌우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생체실험 여부에 대한 논란」 때문이었다. 

 

김봉한팀이 경락 연구과정에서 인체 생체실험을 했다는 것은 필자로서도 결코 믿고 싶지 않은 일이다. 필자가 1992년 『김봉한』을 발간한 뒤 여러 사람들로부터 북한 당국이 생체실험을 자행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북한당국이 봉한학설을 서둘러 폐기하고 김봉한을 숙청했다는 것이다. 

생체실험 여부에 대한 논란

인체생체실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 수괴였던 히틀러의 친위대나 일본 제국주의 관동군 731부대가 저지른 일이다. 그들은 광란의 학살행위에 곁들여 포로와 민간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생체해부를 자행했다. 

 

1956년대 후반 경락을 연구하던 김봉한팀은 생체실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경락이 생물의 죽음과 동시에 사라져 버리기에 오직 살아 있는 생물에서만 관찰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동물실험을 통해서 경락을 확인했다. 

 

그러나 인체에서 경락을 확인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수술시에는 살아 있는 인체 내부를 관찰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술이 목적이기 때문에 충분한 관찰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멀쩡한 사람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침 「특별한 경우」의 조건이 조성되었다. 동의학 과학화 작업 추진을 결정한 1956년 8월 당대회에서는 「8월 종파사건」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소위 「연안파」를 중심으로 한 반(反)김일성 세력이 조직적으로 김일성에게 저항했다 실패한 사건이었다. 

 

연안파 원로였던 부수상 최창익을 필두로 조선직업총연맹 위원장 서휘, 상업상 윤공흠, 육군대학 총장 김을규가 차례로 연단에서 김일성과 그의 정책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들은 당의 중공업 정책, 만주 빨치산 출신 일변도 우대 정책,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1인독재가 북조선에도 존재한다고 지적한 뒤 지도체제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립을 기대했던 최용건이 김일성 지원 발언에 나섬으로써 대세는 김일성 쪽으로 기울었다. 최용건은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 시절 세운 혁혁한 무공과 광복 이후 당과 국가를 이끌어온 업적을 강조했다. 최용건의 발언으로 분위기를 역전시킨 김일성 지지자들은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반동」이니 「간첩」이니 하는 극단적인 용어를 써가면서 극렬하게 비난했다. 

 

오전 회의가 끝나자 위험을 느낀 서휘, 윤공흠, 김을규 등은 오후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고 중국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미처 도주하지 못한 연안파, 소련파 인사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북한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유례 없는 조직적인 저항에 혼이 난 김일성은 「8월 종파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 『인간 취급을 하지 말고, 씨를 말리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말로 믿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김봉한으로부터 인체 생체실험 필요성을 보고받고 있었던 당국자들이 숙청된 종파분자들을 생체실험용으로 쓸 것을 김봉한팀에게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김봉한팀은 할 수 없이 생체실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봉한학설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외국 학자들은 봉한학설의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생체실험 부분을 물고 늘어졌다. 봉한학설에서 생체실험 문제는 치명적인 위험 요소였다. 생체실험을 했어도 문제가 되지만 하지 않았어도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생체실험을 하지 않았다면, 『경락이 살아 있는 생물체에만 존재한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실험만으로 인체에 무리하게 적용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된다. 

 

했어도 문제가 되고, 하지 않았어도 문제가 되는 심각한 사안임을 깨달은 북한 당국은 서둘러 봉한학설을 폐기하고 김봉한을 숙청하는 것으로 문제를 덮으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박금철의 딸을 위해 부정을 저질렀다는 독직죄를 김봉한에게 씌워 숙청한 듯하다. 

 

이상의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결국 김일성은 김봉한의 발견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북한에서는 김봉한이란 이름은 사라지게 된다. 그와 그의 학설은 아예 없었던 것으로 돼버렸다. 

 

『조선중앙연감』에는 1962~1965년 판까지는 김봉한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그 어디에도 김봉한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북한 동의학 관련 자료와 인물을 집대성한 『동의학사전』에도 다른 동의학자들은 많이 소개돼 있지만 김봉한은 없다. 철저히 폐기시켜버린 것이다. 

 

김만철씨에 의하면 「조선의 망신」이라는 비난이 쏟아져 견디지 못한 김봉한은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연구원 건물 고층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고, 혹자에 의하면 아오지 탄광으로 유폐되어 거기서 자살했다는 말도 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김봉한이란 이름은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남쪽에서 결론지은 공식적 평가도 비슷한 것이었다. 공산권문제연구소는 학설의 경과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때는 북한의 김봉한(金鳳漢) 경락연구소에서 다년간에 걸쳐 세계 최초로 「경락체계 및 산알에 관한 학설」의 연구 완성에 성공했다고 요란하게 선전했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그것이 모두 허위 날조라는 사실이 드러나 국제적인 망신을 했으며, 김봉한을 비롯한 경락연구소 간부들은 모두 숙청당했다』(『북한총람』, 공산권문제연구소, 1979) 

「봉한관」 존재 확인 시도

필자는 1992년 9월 해설집 성격의 책 『김봉한』을 내놓아 김봉한 박사를 세상에 널리 알린 바 있었다. 책을 내놓은 후 돌아온 반응은 김봉한 박사의 인생만큼이나 흥미롭고도 극적인 것이었다. 

 

책이 1만부 가까이 팔리면서 상당히 많은 독자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연락을 한 독자의 대부분은 일반인이었고, 소수지만 의사와 한의사도 있었다. 

 

독자들의 반응에서 부정적인 것은 「전혀」 없었다. 『말도 안 된다』 『어디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느냐』 『북한의 인사를 그렇게 찬양해도 되느냐』 등등의 부정적인 반응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연락의 대부분은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격려와 김봉한 박사의 봉한학설에 공감한다는 내용이었고, 나머지는 관련 자료 요청과 필자 신변에 관한 문의였다. 

 

전통의학에 대한 남다른 신뢰와 애정을 갖고 있는 중앙대 의대 김영구 교수(44, 의학박사)는 현재 의료계가 봉착해 있는 제반 난관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참신한 충격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인간 정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하고자 정신과학학회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표준연구원 방건웅 박사(45, 금속공학)는 봉한학설을 『노벨상을 받고도 남을 만한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생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연세대의대 원주캠퍼스 생화학실장을 맡고 있는 김현원씨는 자신이 직접 봉한학설을 재조명해보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응의 종합적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봉한학설의 재조명에 대한 실질적인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는 의사와 한의사를 비롯한 관련 전문가들이 침묵을 지킨 영향이 컸다. 

 

필자가 5년 만에 『소설 김봉한』과 『환자도 죽고 의사도 죽는다』로 다시 봉한학설의 불길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전북대 수의과대학 대학원생 조성진씨의 「봉한학설 일부 검증 성공」이라는 쾌거였다. 

 

그는 『김봉한』을 읽고는 감명을 받아 1994년 말부터 동물실험을 통한 봉한학설의 확인을 시도했다. 그 결과 그는 봉한학설대로 봉한관이란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 소식을 필자에게 편지로 알렸다. 그 후 우리는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봉한학설 복원이라는 역사적인 작업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는 벅찬 흥분에 휩싸여 갔다. 그러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편지 하나를 소개한다. 

 

『선생님, 저는 오늘 12월22일 봉한관을 정말로 확실하게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돼지 해부를 통해 대동맥 내에 가지로 뻗어나가는 봉한관을 확인하고 슬라이드 필름에 담았으며 혈관 밖의 외봉한관과 심장 내의 거미줄 같은 내봉한관, 그리고 콩팥과 허파에서 기관봉한관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현상은 서울로 보내야 된다고 하여 2~3일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현상이 되는 대로 다시 편지 드리고 사진을 동봉하겠습니다』 

우리 한의학계 분발 촉구

그런데 그는 얼마 후의 편지에서 내가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했다. 즉 그의 지도교수에게서 거부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지도교수는 조씨가 관찰한 것이 봉한관이 아니고 혈액 내의 섬유소(fibrine)라고 주장했다. 동물이 죽고 나서 혈액이 응고되면서 혈전이 형성되고 그 혈전의 구성성분 중의 하나가 섬유소인데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수는 그것을 논문 테마로 인정해 줄 수 없음을 시사했다. 

 

그는 지도교수의 반박에 감히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하던 일을 중단해야만 했다. 지도교수의 눈에서 벗어나면 조교 생활이 힘들어질 것이고 아울러 학위 취득에도 애로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커다란 아쉬움을 남긴 채 더이상 봉한관 확인 작업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필자로서도 안타깝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필자는 조성진씨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다시 한 번 봉한관이 실재함을 확신할 수 있었다. 또한 봉한관을 찾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님도 느낄 수 있었다. 

 

봉한학설에 의하면 봉한관은 생명체의 가장 근본적인 조직이다. 생명현상을 논할 때 봉한관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조직이다. 그렇다면 현대 의학자들은 왜 봉한관을 확인하려 들지 않는단 말인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한국인 중에 서양의학을 전공한 이들에겐 아마도 뿌리 깊은 엽전의식 같은 것이 있는 듯하다. 「엽전의식」이란 우리 전통과 역사에서 뭐 그리 대단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의식이다. 서구에서 도래한 것만 믿을 수 있고 합리적인 것이라는 의식이다. 

 

서양의학자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한의학을 한 사람들은 어떻게 된 일인가. 그들도 잠재적인 엽전의식을 갖고 있단 말인가. 겉으로는 민족의학 운운하면서 속으로는 서양 의학에 굴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의학을 객관화하고 현대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봉한학설을 어째서 그토록 방치하고 있단 말인가. 

 

오히려 일본의 의학자들이 봉한학설의 가치를 조심스럽게 평가하고 있다. 『동양의학의 과학적 접근과 임상』(김덕곤 외 역, 서원당, 1991)에서 서양의학을 전공하는 일본의 의학자들은 봉한학설을 비교적 상세히 서술한 끝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상과 같이 봉한소체와 봉한관은 이론이 대단히 정연하게 기재되어 있어서, 이것이 고전적인 경혈과 경락을 해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그 후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추시(追試)되었고, 추시한 대부분이 부정적이어서 그 실체가 불명인 채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연구과정이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많아 앞으로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봉한학설의 찬란한 미래

봉한학설의 출현으로 동양의 전통의학은 모호한 개념을 근거로 하고 있는 비과학적 의학이라는 지금까지의 천대를 극복하고 새로이 국제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현대 서구의학이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의 현실로 볼 때 더욱 시의적절한 일인 것이다. 

 

현재 전세계에는 암과 에이즈를 포함한 불치병·난치병이 수두룩하다. 서구의학은 이런한 질병들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황하고 있다. 경락의 개념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서구의학은 필연적으로 질병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반쪽 의학」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서구의학의 근본적 토대인 해부학과 수술이 위기를 맞고 있다. 해부 실습용 사체(死體)가 갈수록 부족하여 해부학 수업이 부실해지고, 수술용 혈액 공급 부족으로 수술이 차질을 빚는 경우가 허다하게 되었다. 봉한학설에 따르면, 특히 장기이식 같은 수술요법은 어처구니없는 넌센스라는 것이 드러난다. 

 

봉한학설은 전통적 침구법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외에도, 최근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어 각광을 받고 있는 대안적 건강법들, 즉 기공(氣功), 단전호흡, 도인(導引) 법 같은 것들이 서양의학을 대체할 수 있는 훌륭한 기법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이 기법들은 모두 경락과 기(氣)의 개념에 그 이론적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봉한학설은 또한 인류에게 노화와 죽음의 문제에 도전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인체의 주요한 기관은 모두 경락 계통을 순환하는 산알에 의하여 끊임없이 갱신 되고 있다. 이러한 경락과 산알의 기능이 곧 그 개체의 노화와 죽음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산알을 순환시키는 경락 계통의 기능이 쇠퇴하면 노화가 일어나고, 기능이 정지 하면 그 개체에 죽음이 닥쳐오는 것이다. 경락의 기능이 쇠퇴하지 않으면 노화 현상이 생기지 않고, 또 경락의 기능이 정지하지 않는 한 죽음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봉한학설의 출현과 그 후속 연구 성과는 전세계 인류의 질병을 백발백중으로 치료하고 노화를 억제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것은 경제적·산업적 측면에서도 대단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백발백중의 의술은 근대에 있어서 서구 과학 기술을 압도하는 최초의 거대한 원천기술이기 때문이다. 치료 기술의 판매에 의해 엄청난 부(富)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세계 인류가 쓰는 의료비용을 어림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의료비용을 전세계 GNP의 1%로만 잡아도 수천억달러에 이른다. 전세계 경제력의 판도를 바꿀 만한 엄청난 돈이다. 이 액수 중의 상당량이 원천 기술을 제공한 우리나라로 매년 흘러들어올 것이다. 엄청난 부의 획득은 자연스럽게 민족의 자주적 통일과 도약으로 이어질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경제 및 기술전쟁 시대라고 한다. 국방에 있어서는 우방이 있지만 기술에 있어서는 오직 적뿐이다. 각국은 자국 보유 기술들을 비싼 값으로 판매하여 폭리를 취하고 더구나 그것이 원천 기술일 때는 장기간 소유권 행사를 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봉한학설은 근대 산업사회에서 서구를 압도하는, 우리가 처음으로 가진 거대한 원천기술이다. 그 기술의 전개가 바로 민족의 자주적 통일과 도약으로 이어질 정도로 엄청난 원천기술인 것이다. 따라서 유폐된 봉한학설을 복원하고 김봉한을 복권시키는 것은 너무도 시급한 일이다. 

 

봉한학설의 복원 작업은 이 땅의 모든 중요한 사업 중에서도 최우선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그 작업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김봉한 연구팀이 약 10년간 얻어낸 연구성과와 실험과정이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북한측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남쪽만이라도 복원작업을 서둘 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번에 졸저 『소설 김봉한』과 『환자도 죽고 의사도 죽는다』에서 지상에서나마 봉한학설의 복원을 시도했다. 앞으로 그것이 구체적 현실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공동철<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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